볼만한 신문스크랩!!

술 취한 종부가 시부에게 벌였던 만행

무화말 2014. 9. 10. 16:51

술 취한 종부가 시부에게 벌였던 만행 [144]

나이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대구 팔공산 근방 한학자 집안의 셋째 며느리가 되었던 우리 엄마.

시댁 근처에 살면서 아침잠이 없고 잔병치레 안 하고 인물도 반반하고 남편 알기를 하늘같이,

거기다가 말씀이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손매가 야무져 곧 모두가 칭찬하는 일등 살림꾼이었다

고 한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기술이 없는 건지 우리 엄마

가 몸에 이상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는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 하면 죄가 되던 시

절이었다.

 

다행히 부부금슬이 너무 좋았던 우리 아버지와 엄마

낮에는 김을 매고 밤에는 책을 읽던 천상 선비였던 우리 아버지는 걱정 말라고,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쫓아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아들을 못 낳아 대를 끊어 놓으면 집안 어른들이 여자를 쫓아 버리던 풍습이 남

아 있던 시절이었으니 엄마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칠거지악

시부모에게 불손해서도 안 되고

말이 지나치게 많아서도 안 되고

몹쓸 병을 지녀서도 안 되고 등등등

그 중에서도 최고의 죄는 단연 무자식이었다.

그러니 자식이 없던 우리 엄마, 아무리 효부면 뭐하고 손맛이 뛰어나면 뭐할 것인가, 여러 해

가 가도록 아들을 못 낳아 죄 아닌 죄를 짓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시아버지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떠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되었다.

 

갈수록 집안 어른들의 눈길이 삼상찮음을 눈치챈 내 어린 엄마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이른

새벽에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어 뒤뜰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

이다 어쩌고 저쩌고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그래도 효험이 없자 영험한 날을 잡아 팔공산 자

락에 올라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 나중에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

벽마다 산에 올라 부처님을 찾느라 미끄러져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리 찢고 뒹굴기를 수십 번'

애초 막돼 먹은 영애 씨에 나오는 김현숙이처럼 부잣집 맏며느리 같았던 퉁퉁한 몸매의 살이

빠지며 전지현 삘이 나오는 완벽한 몸매를 가진 에스 라인의 소유자가 되었다.

 

무슨 운명의 조화인지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엄마를 더 좋아하게 된 우리 아버지

한동안 시큰둥 멀리 했던 춘정에 재차 불이 붙고 날마다 밤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새벽에 닭

이 울 때까지 빨간 동화책을 그리기에 바빴다. 아버지가 점점 수척해지자 시어머니가 내 아들

잡겠다고 난리가 났다. 이후는 각방, 고추 당초 매운 시집살이 서럽기만 한데 이놈의 불타는

청춘을 어이 할꼬. 시어머니 피해서 뽕밭에서 밀밭에서 메밀밭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온통 바깥이 모텔이고 그 밤이 마냥 좋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니면 부처님의 공덕일까 하늘

이 굽어 살피시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은 아니지만 금지옥엽같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때 울 엄마 나이 방년 열아홉.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십 년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를 파계시켜 버린 여세를 몰아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알몸으로

스승을 유혹했다가 실패하여 완전 뻘쭘해진 황진이와 그 황진이를 너머 머리에 시똥도 안 마른

새파란 이팔청춘에 옥색치마 휘날리며 광한루 담장 넘어 이도령을 꼬시던 조선 최고로 발칙한

년 춘향이가 당시 한창 꽃다운 나이 이십 세 전후였다. 이름하여 인생의 봄이었다. 황진이도 십

대, 춘향이도 십 대, 내 엄마도 십 대 그렇지만 난 내 엄마가 제일로 짱이다. 내 미모가 어디서

왔겠는가!

 

난 두툼한 돋보기에 갓을 쓰고 야고 시때 담뱃대를 문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라다시피 했다.

인생길 황혼녘에 얻은 손녀였기에 할아버지 사랑은 각별했고 비록 딸이기는 하지만 아들을

못 낳는다고 내 엄마를 내쫓을 궁리를 했던 이리같은 친할머니의 거사도 물거품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몸 푼지 3일도 안 돼 다음 번엔 아들, 다음 번엔 아들을 외친 할머니도 겉으

로는 나를 보고 아무 짝에도 쓰잘데기 없는 가시나라고 했지만 머리도 빗겨 주고 이도 잡아

주고 해거름에 심심하여 마실에 다녀 올 때는 늘 아장아장 걷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이뻐해 주셨다. 내 동생을, 다음 번엔 꼭 아들을 얻고자 다짐했던 내 엄마의 꿈은 세상을 떠

나는 날까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난 무남독녀 외동딸이 되었다. 하지만 무던

했던 시아버지에 여자라고는 엄마밖에 몰랐던 아버지덕에 엄마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사셨지

싶다.

 

잘 살지는 못 했지만 삼시 세 끼 굶지 않고 유복하게 자란 나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영향

으로 문자도 쓸 수 있었고 여자는 많이 배우지 못 하던 시절임에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스무 살 여름방학 때 낙동강가 상주로 캠핑을 갔다.

난 선암계곡 도담삼봉같은 단양팔경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자개 사벌 왕국 상주에도 낙동

팔경과 깍아지른 절벽과 노송이 아름다운 경천대가 있었다. 캠핑 첫날 강가에서 한 남자

를 만났으니 이 남자가 스무 살 꽃띠 나의 첫사랑이자 지금의 내 남편이다. 나는 상주 양반

가문의 3대 독자요 당시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었던 총각과 펜팔을 하며 사랑을 키워 갔다.

 

지금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함창 비단시장이 설 정도로 유명한 누에 고치, 벽골제 의림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에 축조한 공검지가 있는 광활한 상주평야에서 나는 쌀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늦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감이 익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한 폭의 그림같은 정경과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곶감들, 나는 이런 고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심성이 후덕하고

마누라 굶겨 죽이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학교 공부를 때려 치우고 사랑을 선택했다.

 

계절마다 누에도 치고 벼도 베고 곶감도 말리던 시댁

그런 집안의 3대 종부가 된다고 했을 때 내 부모님과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름을 뒤집어 쓰

고 불섭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말렸지만 나는 다행히 타고 난 복이 커서인지 내 선택이 옳았다.

남편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를 무시하거나 속 썩인 적 없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내 편

이고 또한 내가 친정 엄마를 닮았는지 자식이라고는 종부인데도 불구하고 달랑 딸 하나뿐이

지만 시아버지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며느리탓 안 하시고 언제나 분에 넘치게 이뻐해 주신다.

부창부수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낳아 준 시어머니도 나보다 더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어루

만져 주신다.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산 사람이 힘들면 안 된다고 제사는 내가 시집 온지 딱 십

년만에 그만하면 할 만큼 했다며 절에 모셔서 내 할 일을 줄여 주셨다. 그런 고마음에 은혜를

갚는다고나 할까 나는 시부 시모 돌아가시면 내 죽는 날까지 남의 손에 안 맞기고 제사를 지내

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의 입을 통해서 이 말이 시부모님 귀에 들어갔고, 그래서 그럴까 나를

향한 시아버지의 사랑이 가을바람에 감이 익듯 예전보다 점점 더 깊어만 간다.

 

간혹,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무데뽀 기질과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구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해병대 출신의 시아버지는 팔순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농주를 즐겨 드시는데

막걸리가 좀 거하신 날에는 밤새 젖가락으로 그릇을 두들기며 타령을 부르고 흥에 겨우면

환갑을 눈 앞에 둔 아들을 툭툭 치거나 찌르며 몸장난을 잘 치신다. 그리고 걸핏하면 당신

의 아들인 내 남편보고 업어 달라고 하신다. 자기 몸무게만큼 곶감을 담아 가라신다. 나도

어릴 때부터 장난을 좋아하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내 남편도 장난을 참 좋아한다.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신혼 때는 장난이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나의 깊숙한 곳에 똥침을 놓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작년 추석 연휴에 성묘를 마치고 와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고스톱판을 벌였다.

3점 당 한 대 손가락으로 이마에 꿀밤을 때리기로 했다.

내가 누구던가?

어릴 적 우리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심심풀이 화투판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설거지 내기, 남편과 맞고를 치면 나는 언제나 그날 특별휴가를 보냈다.

아, 그런데 시아버지가 동네 노인정에서 십 원짜리 고스톱을 쳐서 실력을 쌓았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내가 시아버지에게 일부러 져 주어야지 했는데 안

그래도 됐다.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제발 살살요.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아파요. 하며 꿀

밤을 맞으며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야심하여 판을 걷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시아버지가

잔을 쏟았다. 내가 걸레질을 하고 있는 사이 남편이 아버지를 모시고 싱크대로 가서 소매

를 털고 얼굴을 씻겨 주고 있었다. 그때 늙은 아버지보다 배나 덩치가 큰 남편 그것도 남

편의 두툼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옛말에 막걸리 먹고 취하면 조상도 몰라본다는 말

이 있듯이 그래서 그랬을까 막걸리를 마시고 취한 나는 갑자기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 싶

은 생각이 들었다.

 

술김에 장난기가 동하여 신혼 때 당한 똥침을 남편에게 돌려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오른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놓고 남편의 엉덩이 뒤에서 밴쿠버 올림픽

때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007 매들리가 끝나는 막판에 두 손을 모아 쥔 다음 검지

손가락을 쭉 펴 붙인 후 팡 하고 총알을 날리던 자세를 하고 살짝 남편의 엉덩이를 향해

똥침을 날리려고 하던 찰라 일이 잘못 될려고 그랬는지 남편이 옆에 걸려 있던 수건을 잡

으려고 훌쩍 피해 버렸다. 나의 손가락은 이미 예리한 각도를 형성하고 목표를 항해 정확

하게 날아가던 중이라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공주거리 제동거리가 너무나 짧은 나머지

관성의 법칙으로부터 나의 상체의 운동 에너지를 충분히 제어하고 동작 그만을 확보하기

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남편의 엉덩이를 향해 날아가던 손가락은 그대로 유연한 궤적을

그리며 남편 앞에 서서 얼굴과 팔에 묻은 막걸리를 씻고 있던 시아버지의 엉덩이에 퍽하

고 꽂히고 말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덩치가 자그마한 시아버지는 그만 "어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

며 나동그라졌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아버지, 갑자기 왜 그래요?" 하고 물었지만 도통

말씀이 없어셨다. 남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 봤다. 그런데 그런데

시치미를 뚝 떼도 모자랄 판에 왜 그렇게 주책없이 웃음이 터지는지 감당이 안 됐다.

보다 못한 남편이 아버지에게 재차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나를 가리키며

"저 년에게 물어 봐" 했다. 나는 그때서야 간신이 웃음을 중간 중간 참으며 "아버님, 정말

죄송해요." 하고 사과를 했다. 아직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남편은 나에게 아버지가 갑자기 왜

저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너무 웃음이 나와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편이 나보고

"미친 년 같아. 미쳔 년" 했다. 그렇다. 난 시아버지 엉덩이에 똥침을 놓은 미친 년이 맞다.

내가 배꼽을 잡고 거실에서 구르며 말을 못하고 웃고만 있자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자 장난기와 여유가 넘치시는 시아버지가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저 년이 이렇게 했어" 하고 두 손을 모아 쥐고 집게 손가락을 모아 붙인 다음

푹 찌르는 흉내를 냈다. 남편은 그제야 이 상황을 파악하고 박장대소하며 웃겨서 죽는가

싶더니 잠시 후 나를 쳐다보고 "어이구, 미친 년아" 했다.

 

이란에서는 프로 축구에서 골 세리머니로 똥침을 놓다가 4500만원 벌금을 물었다.

그날 이후로 성격좋은 시아버지는 나만 보면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며 슬슬 피하신다.

졸지에 난 활달하고 털털하며 성격좋은 종갓집 3대 독자 며늘아기에서 칸초라는 별명을

하나 얻었다. 나만 보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웃으면서 칸초 칸초 하는데 완전 미치겠다.

 

이 모든 기쁨과 웃음이 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한가위 덕분

이지 싶다. 허리가 굽은 시아버지의 오래된 추억이 익어간다. 점점 우리 곁을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언제까지 추석을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많이 웃으면, 많이 웃겨 드리면

저승 사자가 데리러 오다가 놀라 달아날까? 황금물결 상주의 밤하늘이 처량하다. 뼈만

앙상한 시아버지 손을 잡고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 추석이 될지도 모르는데 보름달을 뚫어

져라 쳐다 봐야겠다. 점점 보름달이 내려온다. 감을 따러 오듯이, 점점 가을이 깊어간다.

이마의 주름이 패여지듯이, 그렇게 그렇게 올해의 가을밤도 가슴시리게 익어간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떠나가고 밤톨은 어디 가고 알밤이 뒤집어 썼던 껍찔만 남겠지.

올해 가을밤도 세월의 거죽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예외가 없기에.